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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즐거운 편지

즐거운 편지

by 진부령편지 2021.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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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보물상자가 있다.

그 보물 상자는 5년에 걸친 유학생활에서도 살아남았고

집을 떠나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도 

결혼을 하고 4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깨끗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헌데 지난 여름 두달동안 쉼 없이 비가 내린 휴유증인지

창고에 있던 나의 보물상자는 습기와 검은 곰팡이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

나의 보물상자는 바로 '편지함'이다.

옛 노래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편지를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라고 바꿔 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먼저 오랜 사진들은 녹아내려 여러장이 들러붙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고

수성펜으로 쓴 편지들은 글씨가 모두 지워져 백지가 되어 있었다.

편지마다 핀 검은 곰팡이를 털어내고 

그나마 읽을 수 있는 편지들은 햇빛에 말렸다.

 

날아가지 않도록 돌로 눌러서 말리는 중인 편지들

 

편지를 정리하는 나를 보던 중학생 딸이 신났다.

"우와~ 카세트 테이프. 나  실물 처음봐"

"우와~ 전보??? 이게 뭐야??"

"푸하하하 엄마 머리 왜이래?"

"크리스마스씰이 뭐야?"

"대박! 우표를 왜 두 개 붙였어? 우표마다 금액도 다른거야?"

"설마 이건... 응팔(응답하라 1988)에서 보던 바로 그 대학가요제?"

순간 나는 구석기인이 되어버린 기분이고

딸아이는 유물을 발견한 기쁨으로 가득찼다.

 

이렇게 궁상을 떨지 말고 그냥 정리해서 버릴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삼십년도 넘게 모아온 편지를 버리자니

적잖이 속이 상해서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도 보관이 불가능해져서 버린 편지가 절반을 넘는다.

가장 아까웠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쓴 교환일기

노트 2권에 빼곡히 적힌 친구의 고민과 우리들의 이야기

내가 쓴 노트는 그 친구에게 있을텐데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된다.

 

애써 말리고 닦고 정리한 이 편지들도

언젠가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편지들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블로그에 가끔 편지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초등학교 친구부터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이메일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편지가 사라지기 전까지,

내 소중한 가족과 친구가 

손가락에 힘을 주고 써서 보낸

고맙고 소중한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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