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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좋은 인연

by 진부령편지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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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아침에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오늘 아침 제대를 하는 군인이 두 손 가득 과자며 비타민 등의 선물을 들고 서 있습니다. 전역을 하고 부대를 떠나면서 저희 가족에게 인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좋은 인연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두 아이에게 선물을 전해 주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 좋은 인연으로 기억될 수 있다니 참 감사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에 마치 선물처럼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된 일들이 떠오릅니다. 오랜 시간 관계를 지속해 온 “좋은 인연”이 있는가 하면, 아무 공로 없이 기적처럼 다가오는 “좋은 인연”도 있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해를 즐겁게 대학생활을 하던 어느 날 저는 지도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봉사할 수 있는 곳, 숙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때 소록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장 소록도 병원과 도양읍 소록지소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하고 소록도에 들어간 저는, 두 달간 봉사자 숙소에 머물며 한센인 마을에서 개인자원봉사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저와 함께 봉사를 하던 3명의 언니들은 이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함께 자원봉사를 하며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봉사기간이 끝나갈 즈음 헤어짐이 아쉬워 함께하는 무전여행을 계획했습니다. 그야말로 무일푼인 4명의 젊은 여인들은 섬에서 나와 녹동에서 제주로 가는 배를 타기로 했습니다. 젊음이 재산인지라 두려움도 없이 무료로 저희를 태워줄 배를 알아보던 차에 한 선장님이 다가오셨습니다. 자신은 완도에 살고 있고,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완도까지만 함께 가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제주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배를 타고 완도로 가서, 선장님의 아내분이 차려주시는 저녁을 먹고, 군대를 가고 없는 선장님의 큰아들이 쓰던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선장님은 제주로 가는 4장의 배표를 끊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용감무쌍한 4명의 여인들은 제주에 입성하였고, 추억하기에 좋은 이야기들을 남기며 여행했습니다.

이듬해 다시 한 달간 소록도를 찾은 저는 완도의 선장님을 찾아 갔습니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대접 받고 선장님, 아내분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다음날 다시 소록도로 가는 버스를 탈 때 선장님은 제게 3만원의 용돈을 주시면서 언제 다시 보겠냐고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그 때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이후 유학생활을 하게 된 저는 자연스럽게 선장님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벌써 16년 전의 이야기이니 선장님이 아직 살아 계신지도 궁금해집니다. 일면식도 없던 4명의 외인들을 따뜻하게 먹이고 살펴주신 선장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선물처럼 다가오는 “좋은 인연”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전역한 청년도 긴 생을 살아가면서 저희 가족을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기억해 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바쁘고 팍팍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 시기에 맺은 “좋은 인연”은 두고두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 삶의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꼭 연락이 닿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누군가의 삶의 어느 한 시점에 이렇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소소하게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지금껏 저에게 “좋은 인연”이 되어준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저도 오늘 누군가에게 “좋은 인연”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 2015년 9월에 쓴 저의 칼럼을 수정하여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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