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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여유있는 사랑

by 진부령편지 2021.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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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하루 종일 집에서 놀기 지루해 하는 두 아이를 데리고 화진포 바닷가로 모래놀이를 나갔습니다. 주중에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어제 오늘 날씨가 좋기도 하거니와, 집에만 있으면 둘이 다투는 일이 더 많기 때문에 긴 시간 놀아야 할 때는 서울에서도 항상 집 밖으로 나가곤 했었습니다.

 

바닷가에 아무도 없는 것 아니냐며 둘째 아이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걱정을 하였습니다. 도착해보니 다른 아이들 서넛이 이 추운 날씨에도 두 다리를 동동 걷고 파도를 따라 뛰어다니며 모래성을 쌓고 있었습니다. 큰아이는 모래놀이만 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기어이 두 다리를 걷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고 물에서 넘어져 엉덩이가 젖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준비해 간 장난감 덤프트럭으로 모래 위에 긴 도로를 그리며 즐겁게 놀았습니다.

 

준비해 간 캠핑의자에 앉아서 두 아이가 노는 것을 보면서 여유롭게 책을 꺼내 든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추웠습니다.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의자를 옮겨가며 앉아 보았지만 바다 바람의 추위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춥지 않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두 아이는 전혀 춥지 않다고 했습니다. 높은 파도의 포말이 마치 하얀 캉캉치마 같다며 재미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마치 저와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장엄한 자연 안에 있을 때는 자연이 곧 선생이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무척이나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과 감각 그리고 행동이 우리가 확신하는 것보다 훨씬 주관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추위에 있건만 바닷물에 뛰어 들어도 춥지 않다는 아이들과, 햇빛을 찾아 의자를 옮겨도 추위에 떠는 저는 같은 추위를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문득 주중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한 군인이 여자친구에게 보낼 편지 두 통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출근을 하면 편지를 부쳐달라고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일하는 직장에서 한 번도 우체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심하며 이틀이 지나갔고, 어떻게든 편지를 부쳐야하기에 함께 일하는 직원에게 우체통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우체통은 바로 제가 매일 지나다니는 길목, 제가 매일 주차를 하는 주차장 앞에 떡하니 있었습니다. 저는 왜 한 번도 그 우체통을 보지 못했을까요?

 

겨울 바다에 앉아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자신의 글을 만든 것은 모두 자신의 유년기를 빛내 준 집 앞의 바다였다고 말한 어느 중국 작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작가는 바다에서 글을 보고, 음악가는 바다에서 아름다운 연주를 듣고, 미술가는 바다에서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봅니다. 같은 객관적 현상 앞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게 느끼고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느낌이 결국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주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앞의 우체통의 사건처럼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줌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편리하고 안전한 방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수가 아닙니다. 다름을 구분하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 다름을 수용하는 것이 대수입니다. 미워하고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 인정하고 함께 가는 것이 대수입니다. 나의 생각이 선택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와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훨씬 여유로운 자세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다짐해 봅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돌아보는 길이요, 제가 이룰 수 있는 작은 평화의 길입니다. 부디 조금 더 여유롭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5년 11월에 쓴 에세이를 정리해서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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