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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고마운 외인들

by 진부령편지 2021.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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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산골로 이사 온지 5개월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해발 520미터에 위치한 집에서 해발 10미터를 넘지 못하는 어린이집으로 매일 등원을 하던 작은 아이는 3개월 동안 날마다 코피를 쏟았습니다. 기압 차이에 적응하느라고 몸이 많이 고단했나 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 선생님이 엄하지만 좋은 분이셔요.”, “선생님이 저만 특별히 블록을 주셨어요.”하면서 어린이집 자랑을 제법 하고 다닙니다.

 

어느 날 작은 아이가 “엄마, 엄마는 베트남 엄마죠?”하고 물어보는 통에 온 집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 일이 있습니다. 엄마가 베트남 엄마이기를 바라고 박박 우기는 통에 제가 “베트남 엄마”가 아닌 것이 미안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엄마도 베트남 엄마가 맞잖아요. 엄마는 대구에서 왔으니까 여기 사람이 아니잖아요.”라며 작은 아이는 울었습니다. 작은아이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의 엄마가 모두 모두 결혼 이주여성이어서 작은아이도 제가 베트남 엄마이기를 바랬나 봅니다. 자신이 속한 어린이집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해결책을 마련해 보고 싶었을 작은아이의 마음이 귀엽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은 집에 와서 엄마, 엄마는 를 잘 붙이는데 자꾸 선생님이 엄마한테 붙이는걸 알려드리라고 해요.”하고 말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한 속사정을 알고 보니,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들은 결혼을 하고 한국에 오자마자 남편과 시댁 가족들을 비롯한 시골 어른들로부터 반말을 듣게 되기 때문에 높임말을 배울 기회가 적고,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도 높임말을 가르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높임말을 가르치면서, 어머니께도 높임말을 가르쳐 드리라고 지도한 것이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어린이집에 문의 할 것이 있어서 원장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외출을 다녀온 남편이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대화를 통해 제가 질문한 것에 대한 답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알아보니 어린이집에서는 아버지들만으로 구성된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어린이집 소식이나 준비물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들과의 소통이 어려워 아버지들과 소통하려고 만들어진 대화공간이었습니다.

 

얼마 전 부모님과의 나들이가 어려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족 나들이에 두 아이를 데리고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고성군의 복지기관에서 주관하는 그 여행에는 저를 비롯한 네 가정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 출발지인 여성회관 앞에 도착한 저는 난감했습니다. 기관에서 여행을 위해 대절한 버스에 올라탄 큰아이와 작은아이, 그리고 저는 다른 엄마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엄마인 저는 오직 여행 안내를 하는 선생님과 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시절 외인으로 살면서 우리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던 것이 문득 떠오르면서, 제가 쉽게 그들만의 리그에 끼려고 하면 서로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복지기관 종사자의 말에 따르면, 현재 이 지역의 복지기관에 등록되는 아동들은 거의 90프로가 다문화 가정의 신생아들이라고 합니다. 많은 결혼 이주 여성들이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남편과 함께 힘겹지만 성실하게 가정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말로만 듣던 다문화 시대를 이곳에서는 일상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도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왕따를 당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큰아이의 학교에도 다니던 읍내 학교에서 상처를 받고 먼 진부령 정상까지 학교를 다니려고 전학을 한 친구도 있습니다.

 

높임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존중받을 기회가 그만큼 적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확실하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들의 입장에 서서 충분히 따뜻하게 환대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분명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자녀들이 아픔을 당한다면,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느끼고 고통당할 것이라는 것을, 이 땅의 모든 한국 어머니들도 알 것입니다. 자녀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는 외인으로 아픔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꼭 국적의 차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외인이 되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나라가 어렵던 시절 해외로 이주한 우리의 선조들도 외인이었습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 그랬고, 하와이로 이주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이 그랬으며, 독립운동을 위해 이주한 이들, 일제 강점기 노동자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외인일 때 따듯하게 맞아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같은’ 처지의 외인 된 자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며 사랑하고 존중해야겠습니다. ‘외인으로 배척하지 않고 구분하지도 말고 언젠가는 다문화 가정이라는 단어도 없어지기를 바래봅니다. 제가 하기 어려운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주는 고마운 이들(시골에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이 정말 귀합니다.), 낮선 이 땅에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주는 대단한 이들, Cám ơn!(베트남어 –고맙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 2015년에 쓴 에세이를 수정하여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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